分享

의자를 그냥 시라고 하면 안 되나.

 庶翁 2018-02-09


    



--버스정거장에서 --오규원--


노점의 빈 의자를 그냥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노점을 지키는 저 여자를
버스를 타려고 뛰는 저 남자의
엉덩이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나는 내가 무거워
시가 무거워 배운
작시법을 버리고
버스 정거장에서 견딘다

경찰의 불심 검문에 내미는
내 주민등록증을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주민등록증 번호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안 된다면 안 되는 모두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나는 어리석은 독자를
배반하는 방법을
오늘도 궁리하고 있다

내가 버스를 기다리며
오지 않는 버스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시를 모르는 사람들을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배반을 모르는 시가
있다면 말해보라
의미하는 모든 것은
배반을 안다

시대의
시가 배반을 알 때까지
쮸쮸바를 빨고 있는
저 여자의 입술을
시라고 하면 안 되나


--길 --오규원--


길에 그림자는 눕고 사내는 서 있다

앞으로 뻗은 길은 하늘로 들어가고 있다

사내는 그러나 길을 보지 않고 산을 보고

사내의 몸에는 허공이 달라붙어 있다

옷에 붙은 허공이 바람에 펄럭인다

그림자는 그러나 길이 되어 있다

     
 


문지 스펙트럼 시리즈로 오규원의 산문집 『날이미지와 시』가 문학과 지성사에서 발행되었다. 1968년부터『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까지 9권의 시집을 낸 오규원 시인은 1965년 등단한 이래 시 속에 삶의 현장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동시에 ‘시의 언어와 구조’의 문제를 가장 치열하게 탐구한 시인이었다. 오규원은 끊임없는 형식에 대한 탐구로 전통적인 시의 문법을 해체하고 시의 새로운 산문화 경향을 주도하였다. 그는 80년대 이후 우리 시단에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현재에도 끊임없이 ‘시와 언어’에 대한 탐구를 계속해오고 있는 우리 시의 살아 있는 전위이다.

     

따라서 오규원의 시론은 우리 현대시의 형식 변화를 들여다볼 수 있는 역사라는 점에서 각별한 의의를 갖는다. 시인의 행보 자체가 현대시의 행보였음을 생각해볼 때 시인이 직접 구축해온 시에 대한 방법론은 우리 현대시의 문법에 관한, 매우 소중한 성찰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1990년대 초반부터 15년 가까운 세월 동안 다듬어온 시인의 ‘날이미지 시’ 론을 정리하고 있으며 우리 시사에서 시적 방법론에 대한 가장 첨예한 자의식을 지닌 시인의 세계관과 문학관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할 것이다.

  

시인은 ‘책머리에’에서 80년대 후반부터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시인은 휴머니즘이라는 미명 하에 인간 중심으로 모든 사물을 이해하고 명명함으로써 세계가 가려지고 왜곡되는 것을 거부해왔다. 시인은 어떤 명사로 세계를 표현할 수 있다거나 어떤 관념 하나로 세계를 해석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따라서 그냥 ‘있을 뿐’인 세계와 인간이 어떤 관계를 유지하며 수사적 인간의 존엄성을 찾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 시인이 내놓은 대답이 바로 ‘날이미지 시’이다.

     

‘날이미지 시’를 이해하는 핵심적 요소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시의 수사법으로서 은유를 거부하고 환유의 방법을 사용한다. 둘째, 세계를 바라보는 데 있어서 관념적인 시각을 완전히 배제한다. ‘날이미지 시’는 수사로서의 은유를 거부한다. 은유가 직관에 의해 세계를 이해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정해주는 해답을 찾도록 만든다고 믿기 때문이다. 대신 인접한 사실들을 결합하고 접속시키는 환유의 방법을 사용한다. 환유적 체계야말로 개념적이거나 사변적인 의미를 부여한 흔적이 없는 ‘현상적 사실’을 드러낸다고 보고 있다. 시인의 작업은 이 ‘현상적 사실’을 이미지화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렇다면 시인은 왜 ‘현상적 사실’을 이미지화하는 데 모든 힘을 쏟고 있는가. 시인은 시에 인간이 문화라는 명목으로 덧칠해놓은 지배적 관념이나 허구를 벗기고 세계의 실체인 ‘현상적 사실’을 날것, 즉 ‘날이미지’ 그대로 옮길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곡 없이 세계와 닿는 시각적 진실과 세계에 대한 직관적 인식, 그것이 시인이 그리고자 하는 ‘날이미지’ 시의 요체이자 시인의 시 세계이다. 시인은 이 ‘날이미지 시’를 통해 관념적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을 배격하고 세계와의 순수한 호흡을 새로이 꿈꾼다.

     

이 책의 1부에서는 이러한 ‘날이미지 시’를 구축하고 그에 걸맞은 탄탄한 시론을 형성해온 과정이 세세히 그려져 있다. 또한 ‘자신의 전 작업을 되돌려 복기할 수 있는 시인’이라는 칭호에 걸맞게 시작(詩作)의 과정을 시인의 목소리로 조목조목 짚어나가는 대목들이 곳곳에 실려 있으며 시인의 작업을 곁에서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2부에는 시인의 육성을 들을 수 있는 대담을 실었다. 문학평론가 이광호와의 대담 「언어 탐구의 궤적」에서는 시인의 성장 과정, 문학을 하기까지 시인에게 영향을 미친 것들, ‘날이미지’와 관련한 시인의 시 세계에 대한 설명이 실려 있으며 이외의 대담들에서도 주로 지난 십여 년간 변모해온 시인의 시 세계에 대한 이해와 설명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대담인 만큼 1부와는 달리 다소 딱딱한 형식을 배제하고 시인의 삶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시론을 읽을 수 있다. 제자들(이창기 시인, 박형준 시인, 서울예대 학보사 등)이 들여다본 오규원의 삶과 시 세계, 이들에게 미친 시인의 영향을 궁금해하는 이들에게도 2부의 대담은 흥미 있게 읽힐 수 있을 것이다. 40년에 걸친 세월 동안 우리 시단의 거목이 된 시인의 삶과 세계관, 그만의 문학관과 독특한 시론이 함께 어우러진 이 책을 접하는 것은 시인의 삶과 작품 세계에 한발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지은이 오규원(1941~2007)은 1941년 경남 삼랑진에서 태어나 부산 사범학교를 거쳐 동아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1965년 『현대문학』에 「겨울 나그네」가 초회 추천되고, 1968년 「몇 개의 현상」이 추천 완료되어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분명한 사건』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이 땅에 써지는 抒情詩』 『가끔은 주목받는 生이고 싶다』『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 등이 있으며 시선집 『한 잎의 여자』, 시론집 『현실과 극기』 『언어와 삶』 등과 『현대 시작법』등이 있다.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대문학상, 연암문학상, 이산문학상, 대한민국예술상 등을 수상하였다.

    本站是提供个人知识管理的网络存储空间,所有内容均由用户发布,不代表本站观点。请注意甄别内容中的联系方式、诱导购买等信息,谨防诈骗。如发现有害或侵权内容,请点击一键举报。
    转藏 分享 献花(0

    0条评论

    发表

    请遵守用户 评论公约

    类似文章